<실종자>,
‘재미’있는
‘카프카’ 소설
저는 이 칼럼을 통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중 <실종자>라는 소설이 아주 재미있고 볼만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카프카는 여러 단편과 장편을 남긴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하루 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회사원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소설 ‘변신’,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주인공이 괴상한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 장편 소설 ‘소송’, 성을 측량하러 왔으면서도 결국 성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측량사 이야기인 장편 소설 ‘성’ 등이 그의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동문
여러분들 중에서도 분명히 많은 분들이 카프카의 작품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카프카의 소설은 술술 읽히지가 않습니다. 카프카가 자신의 소설에서 만들어놓은 세계의
질서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이 모두 낯설게 다가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편소설 ‘성’을 예로 들면, ‘성’을 측량하라는 부름을 받고 온 측량기사가
‘성’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성’의 줄거리는 측량기사가 성에 들어가려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카프카 소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
자체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소설의 굵직한 줄거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소한 요소들에서도 드러납니다. 다시 ‘성’을 보면, 측량기사가 전혀 모르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측량기사의 조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조수들은 뭔가 열심히 일을 하는
듯 하면서도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뿐더러 끊임없이 측량기사를 방해하고 감시하기까지 합니다. 조수는 말 그대로 수족처럼 측량기사를
도와주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도와주키는커녕 방해하고 감시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측량기사는 왜 내가 이들을 조수로
써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고, 바꾸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조수들에 대해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을
뿐이죠.
그렇습니다. 카프카 소설에서 다른 소설과 같은 서사적인
재미를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카프카 소설 특유의 저러한 상황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카프카의 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부여된
부조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속에서 열심히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결국 그 부조리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기에 부조리하게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아무리 열심히, 빨리 돌려봐야 그 쳇바퀴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실종자>는 이러한 카프카의 작품 중에서는 이야기의
재미가 있는, 서사적인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카프카 소설 중 그리 유명한
작품은 아닙니다. 저는 카프카의 주요 소설을 본 이후에 접하게
되었는데 이전 소설보다는 훨씬 술술 읽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실종자>의 주인공인 ‘카를 로스만’은 원래 독일 사람인데 아버지에게 추방되어
16세의 나이에 아메리카의 뉴욕으로 오게 됩니다. 혈혈단신의 이민자로 뉴욕에 도착한 카를 로스만은 뉴욕에서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꿈꿉니다.
네, 그렇습니다. <실종자>는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을 바탕에 둔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겪는 온갖
모험과 희망이 그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음울하고 괴이한 상황에서 맴돌기만 하는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파멸로 끝나는 다른 작품들과
다릅니다. <실종자>는 해피엔딩, 또는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오클라호마 야외극장’에 배우로 취업합니다. 그것이 <실종자>의 결말입니다. 그 이후의 과정은 나와 있지 않은데, 카프카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결말을 지은
것인지, 그 이후 이야기도 구상했었는데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신대륙에 혈혈단신으로 흘러들어와 온갖 잡일을 하며 좌충우돌하던 주인공의
종착지가 오클라호마(당시로서는 세계의 가장 변두리겠죠) 극장의 배우라는 것은 제게는 매우 희망적이고
가슴이 뛰는 결말로 느껴졌습니다. 카프카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은 벌레로 남아
사과에 맞아 죽거나 이유도 모른 채 처형당하거나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실종자>는 카프카 작품 특유의 본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실종자>에서도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자신에게 부여된 부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열심히 노력할 뿐입니다. ‘카를 로스만’이 갑자기 배우가 된다 한들 그의 고달픈
인생이 갑자기 풀릴 리는 없고, 그가 해오던 방식을 보았을 때 오히려 그는
그곳에서도 파멸할 것이니까요. 다만, <실종자>의 배경은 신대륙 ‘아메리카’이기 때문에 그
다음, 그 다음이 얼마든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실종자>는 카프카 소설의 기본적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을뿐더러 더욱 더 절망적인 소설일 수도 있겠습니다. 부조리의
질서에 따르는 본질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은 결국 무한한 고통과
괴로움일 수 있으니까요. 다람쥐가 쳇바퀴를 아무리 열심히, 빨리 돌려봐야 그 쳇바퀴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은 여전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