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고 판타지 스토리
0.시작하며.
서현고 총동문회가 웹진을 발간한다며 창간호에 뭐라도 써주지 않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다만 총동문회 회장과 친해서 그리고 SNS에 쓰잘데기 없는 글을 자주 끼적일 뿐이어서 가볍게 받은 이 요청. 가볍게 쓰려고 해도 잘 안나온다는 이야기에 더 가볍게 쓰란다. 더 이상 가벼울 수 없을만큼 가벼우란다. 뭘 어찌해야 가볍고도 쓸데없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런 저런 주제를 떠올리다가 말다가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서현고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서현고 이야기를 서현고총동문회에 웹진에 쓰는게 한편으론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론 웃긴일이다. 내가 풀어낼 수 있는 서현고 이야기가 사실 모두가 아는 서현고의 이야기일 뿐이거든. 그렇다고 딱히 글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에 다시 한번, 그땐 그랬지.. 공감하며, 마치 어르신들이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반복하듯이 내 기억 속의 서현고를 풀어내볼까.
서현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하고 생각해보니 여러가지 주제가 새록새록 생각나는 걸 보니 참 특별한 학교이긴 했나보다. 가벼운 글을 앞으로도 계속 연재해 달라는 회장의 요청이 있다보니 서현고에 대해 꺼낼 수 있는 주제 중에 생각나는 대로 꺼내봐야겠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을 꺼내다보니 대부분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겠지만 일부는 과장되거나 각색된 기억일 수 있다. 뭐 그 당시의 사실관계의 디테일이야 이제와서 무슨 상관인가. 그냥 내 기억 속의 서현고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아니어도 큰 상관없는 일이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익숙했던, 모두가 다이어리수첩을 가지고 있던 시절,
서로 다이어리에 들어갈 메세지를 예쁘게 써서 주는게 매너였던 시절,
스티커 사진이 폭발하고 주구징창 씨디를 사서 듣던 시절의
서현고 이야기.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픈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나이 먹어서까지 꼭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1.서현고의 높은 수준.
당시 서현고의 성적 수준은 정말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고1때 3월에 친 모의고사 학교 평균이 전국 5위를 기록한게 기억이 난다. 그 전까지는 안양고 백석고와 함께 비평준화지역의 상위권을 담당하는 일반고 3개교가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다는데, 어쩐 일인지 그 해만큼은 입학하자마자 받은 신입생들의 모의고사 성적이 엄청난 수준이었던 거지. 전국 5위라는 성적은 전국의 그 수많은 특목고의 성적까지도 포함한 것이어서, 구체적인 순서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서울에 있는 과학고 둘, 민사고, 경기를 대표하는 과학고 하나까지 총 4개교를 제외하곤 전국의 특목고와 일반고를 눌러버린 순위를 차지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입학하기 직전 졸업생들의 상위권 대학의 진학률도 높았지만, 당시 분당에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서현고의 위세는 점점 더 높아져 갔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위세가 대단했던 서현고의 소문을 듣고, 강남이나 수원 용인 성남 등 분당 근처의 경기권에서 과학고를 안간 수재들이 서현고 하나 바라보고 이사를 오는 경우도 한반에 몇명씩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땐 참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지.
2.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요?
교복만 입고 다녀도 이런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았었다. 분식을 파는 트럭에서 군것질을 하고 있는 나와 친구에게 어느 아줌마가 저런 질문을 하면서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중2 혹은 중3 자녀를 두고 있는 모양인데, 집도 시범단지라 가깝고 서현고가 전국적인 명성을 떨친다고 하니 너무너무 서현고에 보내고 싶은데, 자녀의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 부모 속만 타들어가는 케이스. 이런 사례가 어디 한둘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는 부모의 애타는 심정이야 어쨌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교복 속 어깨뽕이 2센치쯤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나 서현고 학생이야. 우훗.
3.문 닫고 들어간 서현고,
글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2남1녀 중 막내로 오빠 두명이 모두 서현고를 졸업한 명문가(?)의 막내자식으로서, 국딩때부터 당연히 서현고를 가야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치솟는 서현고 입학 커트라인은 나에게 꽤나 넘기 힘든 벽이었고, 모두가 지원을 못하게 말리고 나같은 애를 서현고 써줬다고 담임이 욕먹고 뭐 그랬었다. 하여간 무슨 깡으로 서현고에 지원했는지 모를 정도로 내신도 부족하고 모의고사 성적도 모자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고에 지원하였고, 우리 부모님은 그런 나의 서현고 입학에 대해서 진작에 체념하실정도로 별 다른 주변의 기대가 없었는데 운좋게도 폭발적으로 성적을 올려서 극적으로 문닫고 들어간 케이스. 당시 수능이 끝난 서현고 6기 둘째오빠는 설마설마했는데 동생이 진짜로 서현고에 들어가는 걸 보고 흥분하여 '쟤 저러다 서울대 갈 수도 있으니 서울대 보내자’라는 망발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4.꼴찌만 해도 꽤 괜찮았던 서현고
들어가자마자 본 반배치고사(이런 단어가 기억나다니 놀라웁다;)에서 뒤에서 5등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뒤에서 5등! 등수를 확인하면서 이 학교에서의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안분지족에 뛰어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라 더이상 올라갈 생각을 접었고, 학교 생활 내내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받고도 전혀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고 매우 해맑은 생활을 했었다. 그냥 서현고 학생인 것만으로 좋았거든. 그 후로는 어딜 가나 해당집단의 내신의 마지노선을 담당하는 내게 있어 서현고는 집단의 마지노선을 올려주어 내가 있을 곳을 올려주는 고마운 집단이었다. 그냥 옆에 있는 친구가 떠먹여 주는 것만 이해해도 모의고사를 치면 전국 평균보다는 훨씬 높을 수 있었거든.
5.비현실적이었던 반평균.
나는 시험볼 때마다 항상 시험직전날에만 벼락치기를 했고, 그렇게 공부하면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적당한 수준에서 이해는 되었으나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이해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암기하는 단계와 출제될 문제를 다양하게 대비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대충 80점 정도까지만 성적이 나온다. 나로선 그당시 벼락치기로 투자한 노력대비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고 봐야지. 중학교에서 80점이면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특별히 아주 못한 것도 아닌 점수였다. 다만 서현고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80점이란 점수가 굉장히 특별한 점수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반 전체의 전과목 평균이 95점을 넘겨서.. 사실은 서현고가 비정상적으로 우등생만 모아놔서 그렇지, 어딜 가나 그 정도로 이해하고 시험보는 학생이 많은게 정상이다. 반평균은 어딜가나 70~80점 정도가 적당하지 않나. 하지만 우리 서현고 친구들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한명한명 각각이 다 중학교때까지 반에서 손꼽히는 성적을 자랑하던 친구들이었거든. 선생님들이 변별력 있게 출제하고 싶으면 일개 내신 중간기말고사따위를 경시대회급으로 내야하는데 그건 정말 불필요한 난이도일 뿐이니 그럴 수도 없고.. 어쨌거나 80점이라는 무난한 성적으로 반평균을 어마무시하게 깎아먹은 나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했고, 그러면서도 속상함이라곤 1도 없었다. 이 철부지 막내를 잘하면 서울대 보낼 수도 있겠다는 꿈을 잠시나마 꾸어본 적이 있는 부모님의 속사정이야 어쨌건간에 나는 매우 해맑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6.내신이 뛰어났던 여자반.
특히 여자반(당시엔 학생들이 공부에 집중을 못할까봐 남녀 분반을 하는게 상식적이었다.)에서는 나처럼 이렇게 대놓고 성적으로 경쟁을 포기한 케이스가 거의 없었고. 여자반이 아니라 전교에서 봐도 예체능 특기생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한 두과목은 아예 서현고에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 숫자보다 더 높은 숫자의 등수를 성적표에서 확인한 적도 있을 정도로 반에서 매우 독특한 케이스에 해당했고. 최종 성적표가 나오기 직전 각자 점수를 확인하라고 꼬리표(이런 것도 기억이 나다니 신기하다)를 받으면 옆의 친구들이 속상한 표정으로 자기가 실수를 한 몇 과목들의 점수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 과목에서 아주 고르게 반평균을 깎아먹은 내 꼬리표는 온 교실을 돌아다니며 속상한 친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자그마치 이런 성적을 받은 애도 저렇게 히히낙낙인데 그냥저냥 감사히 자신의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메세지로 읽지 않았을까 싶다. 꼬리표를 돌아다니게 한 장본인은 그런 고차원적인 의도따위 전혀 없이 그저 시시덕거릴 뿐이었지만.
7.경쟁보다 자율성이 돋보였던 학교
서현고에 가면 반에서 너무 심하게 경쟁해서 힘들 것이다라고 지레 짐작해서 충분히 서현고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위권 고등학교로 진학한 케이스들을 몇몇 보았는데, 당시에는 ‘특차’(수능성적만으로 내신없이 대학을 지원하는)전형이 있었기에 그다지 교내에서 친구들을 밟고 올라서려는 심한 경쟁 분위기는 감지하지 못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 - 경쟁을 포기한 꼴찌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만, 정말이지 서현고 생활에서 기억나는 건 성적 경쟁 같은 것이 아니다. 원체 다들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풀어줬던 두발과 복장규제, 야간 자율학습은 강제가 아닌 정말 말그대로 자율이었던 것, 그리고 친구처럼 지내주었던 선생님들이 기억에 남는다.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는게 당연했던 학교.
8.노는것도 잘했던 서현고
그리고 수재들이 공부에만 관심을 가질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다른 부분에서도 꽤나 열심이었던게 기억이 나는데, 아주 활발했던 동아리 활동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분당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 최고였던 축제(축제 문화를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들은 공부에 대한 강박이 있던 수많은 친구들의 가슴을 몰캉몰캉하게 만들 정도로 매우 압도적인 행사였다. 그 디테일은 아무리 써도 부족하니 따로 쓰기로 하고.
9. 서현고 학생들의 관심사
공부잘하는 애들이라고 해서 공부에만 관심 갖는게 아니다. 별의별 사소한 것들에 관심들이 많았는데. 그 소소한 관심사들에 대해서는 사실 끝도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텐데 지금 얼른 생각나는 것만 대충 이러하다.
몇반 누구랑 몇반 누구랑 사귀었는가, 저기 눈에 띄는 누구는 어느 동아리인가, 점심 방송에 좋아하는 친구를 위한 신청곡으로 무엇을 신청할까, 소풍이나 수학여행 그리고 수련회나 축제 등 전적으로 사복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에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입을 것인가, 반 친구들은 어떻게 입고 왔는가, 대표적인 킹카와 대표적인 퀸카들은 어떻게 입고 왔는가, 장기자랑 행사에서 누가 무슨 춤을 추었는가, 맨날 노래하러 나오는 쟤는 왜 맨날 삑사리인가(김준 반성해라), 복귀한다는 서태지 신보앨범은 몇월 몇일에 발매하는가, 라르고(당시 서현역을 휘어잡았던 레코드가게)에 몇시까지 가면 되는가,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뛰어가서 사오면 늦지 않을 수 있는가, 그 당시 핫했던 아이돌 그룹은 우리 반 친구중에 누가 어느 멤버를 좋아하는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타이타닉 영화를 금산시네마에서 보려면 언제 야자를 빼먹어야 하는가, 레오나르도는 왜이리 잘생겼는가(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꽃미모), 저기 저 남자선배는 왜 저렇게 머리를 길러서 머리띠를 하는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불꽃같은 피부를 돋보이게 강조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폴로나 나이키 짭(모조품)을 사려면 이태원에 가는 것이 옳은가, 곱슬머리들에게 혁명적인 기술이었던 매직스트레이트라는 것이 처음 등장했는데 분당 미용실에선 30만원 이대앞 꽃샘미용실에선 3만원에 할 수 있는게 실화인가, 종아리의 알통을 감추고 다리가 예쁘게 보이게 하는 적정한 발토시 높이는 어느 선인가, 그 당시 유행했던 더듬이 머리 - 머리가 작아보이기 위해서 옆머리를 내고 얼굴에 딱 붙이는 - 그 더듬이머리에는 어느 정도의 숱과 길이가 적당한가, 고등학생 여드름 터지는 피부에는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억양주의) 클린앤클리어 로션과 포밍클렌저는 왜 그리 좋아보이는데 얼굴이 땡기는가, 서현역에 어느 떡볶이집이 맛있는가, 학교앞 편의점 건물 안쪽에 새로 생긴 모여라분식집은 핫도그를 매 쉬는 시간마다 먹어도 건강에 문제가 안생길까, 베지밀은 에이가 낫냐 비가 낫냐, 학교 앞 편의점(1층건물인데다가 주변 환경이 조용해서 각종 광고나 영화, 드라마 촬영장소로 자주 쓰였다)에 드라마 촬영시 인기 배우들이 언제 도착하는가, 변비가 있는 친구들이 왜 멀쩡한 학교 화장실을 두고 삼성프라자까지 가서 해결하고 오는가 등등등에 대해서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들을 했더랬다.. 사실 쓰려고 마음먹으면 끝도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 지금 와서는 디테일이 잘 기억도 안나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나 중요했던 문제들이었다.
10.대단히 비현실적이었던 고등학교.
우리나라만큼 대학입시서열이 중요한 나라에서 고등학교 3년간을 그 어떤 자율성도 빼앗긴 채로 암흑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양하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지만 그 당시엔 수능과 내신 밖에 없던 시절. 그 당시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오죽했으면 여고괴담(1998 개봉) 같은 영화가 6편까지 나오도록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까. 그만큼 힘들 수 밖에 없는 3년의 고등학교 시절..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도 흥분하기 바빴던 열뜬 시기를 공부로 억누르고 살면서 우리들 각자에게 당연한 스트레스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를 포함한 학생들 각자가 ‘서현고 학생이어서’ 비교적 행복하게 보냈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일단 서현고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3년 내내 함께 했고,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학교 분위기, 놀 땐 미친듯이 놀더라도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놀라운 학습환경 등이 있었기에, 학업성취도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나같은 철부지도 그나마 크게 뒤쳐지지 않고도 행복하게 보낼수 있었다.
서현고의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는 분당이라는 새로 탄생한 신도시에서 갑작스레 전국적인 절대강자로 떠오른 명문학교, 그중에서도 사립이 아닌 공립학교, 특목고가 아닌 일반고여서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비록 건물 상태는 분당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시설로 매우 후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성적수준은 전국적인 명성을 날릴 정도로 매우 뛰어났었고, 그 때문에 전국에서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는 내노라 하는 교장, 교감, 선생님들이 오고싶어 했던 학교였었다.
실제로 도단위 교육장 승진을 앞둔 분이 서현고 교장으로 부임해 오셨었고 그 분과 또 한분의 유능한 교감 선생님 때문에 무슨 임용고시 수석하셨거나 잘 가르치기로 유명하시다는 분들이 여럿 오셨다고 들었다. 그 교장 선생님은 축제때마다 수십개의 동아리들에 아무리 못해도 40만원 이상 지원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게 공립에서 누군가 공금을 도둑질하지만 않는다면 리더가 깨끗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는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 우리가 고3이었을 때 은퇴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은퇴하실 당시 우리들 졸업식에서 축사를 마치자 강당에 있던 학생들 대부분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던 기억이 난다. 진심으로 존경했었다. 그 교장 선생님을.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감동시켜던 일화는 정말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선생들마저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3들 중에 야간자율학습을 11시까지 연장했으면 하는 미친 놈들이 서현고에 꽤 많았었는데, 교무실에서 회의때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돌아가면서 11시까지 하자는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선생님들 대다수가 반대를 하셨다고 한다. 가정이 있는데 어떻게 11시까지 하느냐고 쉬고 싶다고. 한시간 더 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11시는 너무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던 선생님들의 의견을 묵묵히 다 들으신 후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그럼, 선생님들 다 가시죠. 제가 남겠습니다.” …그 이후, 선생님들은 아무말 없이 11시까지 남았다고 전해진다..
그 시절 그렇게 좋은 학교였는지도 모르고 여느 고등학생처럼 담임욕하고 함께 놀던 유치하고 어설펐던 친구들은 이젠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당시 분당의 중심지였던 서현역 로데오거리, 오픈한지 얼마 안되어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삼성프라자에 도보로 5분안에 당도할 수 있었던 학교, 그렇기에 도시적인 혜택까지 더욱 많이 받은 학교. 개교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신도시의 학교여서, 전례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다른 명문고들과는 달리 그 어떤 규칙도 절대적인 것이 없었던 학교. 그래서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던 - 우리나라처럼 억압된 입시환경에서는 다소 비현실적인 문화까지 가능했던 학교였다. 그 문화가 교장이 바뀐 이후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소식에 다소 슬펐다만, 아무튼 내가 다니던 시절 서현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시는 있을 수 없는 판타지 속의 학교였다.
11. 마치며.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오른 것들 중에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음이 놀라운 것들이 꽤나 있었고.
그렇게 19년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시간이 새삼 행복했다.
한번에 다 말하면 재미없지 하면서 줄인 것이 여기까지 길어져버렸지만
쓰면 쓸 수록 마치 내 멋대로 ‘응답하라서현고'를 구상해본 것 마냥 즐거웠고,
떠올릴 수록 다채롭게 펼쳐지는 기억 속에 허우적대다가 더 쓰고 싶은 것을 참으며 겨우 빠져나온다.
그런 판타지스쿨의 학생이었던 것.
이 사실이 나는 아직까지도 자랑스럽다.
끝.
0.시작하며.
서현고 총동문회가 웹진을 발간한다며 창간호에 뭐라도 써주지 않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다만 총동문회 회장과 친해서 그리고 SNS에 쓰잘데기 없는 글을 자주 끼적일 뿐이어서 가볍게 받은 이 요청. 가볍게 쓰려고 해도 잘 안나온다는 이야기에 더 가볍게 쓰란다. 더 이상 가벼울 수 없을만큼 가벼우란다. 뭘 어찌해야 가볍고도 쓸데없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런 저런 주제를 떠올리다가 말다가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서현고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서현고 이야기를 서현고총동문회에 웹진에 쓰는게 한편으론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론 웃긴일이다. 내가 풀어낼 수 있는 서현고 이야기가 사실 모두가 아는 서현고의 이야기일 뿐이거든. 그렇다고 딱히 글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에 다시 한번, 그땐 그랬지.. 공감하며, 마치 어르신들이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반복하듯이 내 기억 속의 서현고를 풀어내볼까.
서현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하고 생각해보니 여러가지 주제가 새록새록 생각나는 걸 보니 참 특별한 학교이긴 했나보다. 가벼운 글을 앞으로도 계속 연재해 달라는 회장의 요청이 있다보니 서현고에 대해 꺼낼 수 있는 주제 중에 생각나는 대로 꺼내봐야겠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을 꺼내다보니 대부분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겠지만 일부는 과장되거나 각색된 기억일 수 있다. 뭐 그 당시의 사실관계의 디테일이야 이제와서 무슨 상관인가. 그냥 내 기억 속의 서현고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아니어도 큰 상관없는 일이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익숙했던, 모두가 다이어리수첩을 가지고 있던 시절,
서로 다이어리에 들어갈 메세지를 예쁘게 써서 주는게 매너였던 시절,
스티커 사진이 폭발하고 주구징창 씨디를 사서 듣던 시절의
서현고 이야기.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픈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나이 먹어서까지 꼭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1.서현고의 높은 수준.
당시 서현고의 성적 수준은 정말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고1때 3월에 친 모의고사 학교 평균이 전국 5위를 기록한게 기억이 난다. 그 전까지는 안양고 백석고와 함께 비평준화지역의 상위권을 담당하는 일반고 3개교가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다는데, 어쩐 일인지 그 해만큼은 입학하자마자 받은 신입생들의 모의고사 성적이 엄청난 수준이었던 거지. 전국 5위라는 성적은 전국의 그 수많은 특목고의 성적까지도 포함한 것이어서, 구체적인 순서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서울에 있는 과학고 둘, 민사고, 경기를 대표하는 과학고 하나까지 총 4개교를 제외하곤 전국의 특목고와 일반고를 눌러버린 순위를 차지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입학하기 직전 졸업생들의 상위권 대학의 진학률도 높았지만, 당시 분당에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서현고의 위세는 점점 더 높아져 갔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위세가 대단했던 서현고의 소문을 듣고, 강남이나 수원 용인 성남 등 분당 근처의 경기권에서 과학고를 안간 수재들이 서현고 하나 바라보고 이사를 오는 경우도 한반에 몇명씩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땐 참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지.
2.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요?
교복만 입고 다녀도 이런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았었다. 분식을 파는 트럭에서 군것질을 하고 있는 나와 친구에게 어느 아줌마가 저런 질문을 하면서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중2 혹은 중3 자녀를 두고 있는 모양인데, 집도 시범단지라 가깝고 서현고가 전국적인 명성을 떨친다고 하니 너무너무 서현고에 보내고 싶은데, 자녀의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 부모 속만 타들어가는 케이스. 이런 사례가 어디 한둘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는 부모의 애타는 심정이야 어쨌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교복 속 어깨뽕이 2센치쯤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나 서현고 학생이야. 우훗.
3.문 닫고 들어간 서현고,
글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2남1녀 중 막내로 오빠 두명이 모두 서현고를 졸업한 명문가(?)의 막내자식으로서, 국딩때부터 당연히 서현고를 가야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치솟는 서현고 입학 커트라인은 나에게 꽤나 넘기 힘든 벽이었고, 모두가 지원을 못하게 말리고 나같은 애를 서현고 써줬다고 담임이 욕먹고 뭐 그랬었다. 하여간 무슨 깡으로 서현고에 지원했는지 모를 정도로 내신도 부족하고 모의고사 성적도 모자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고에 지원하였고, 우리 부모님은 그런 나의 서현고 입학에 대해서 진작에 체념하실정도로 별 다른 주변의 기대가 없었는데 운좋게도 폭발적으로 성적을 올려서 극적으로 문닫고 들어간 케이스. 당시 수능이 끝난 서현고 6기 둘째오빠는 설마설마했는데 동생이 진짜로 서현고에 들어가는 걸 보고 흥분하여 '쟤 저러다 서울대 갈 수도 있으니 서울대 보내자’라는 망발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4.꼴찌만 해도 꽤 괜찮았던 서현고
들어가자마자 본 반배치고사(이런 단어가 기억나다니 놀라웁다;)에서 뒤에서 5등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뒤에서 5등! 등수를 확인하면서 이 학교에서의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안분지족에 뛰어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라 더이상 올라갈 생각을 접었고, 학교 생활 내내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받고도 전혀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고 매우 해맑은 생활을 했었다. 그냥 서현고 학생인 것만으로 좋았거든. 그 후로는 어딜 가나 해당집단의 내신의 마지노선을 담당하는 내게 있어 서현고는 집단의 마지노선을 올려주어 내가 있을 곳을 올려주는 고마운 집단이었다. 그냥 옆에 있는 친구가 떠먹여 주는 것만 이해해도 모의고사를 치면 전국 평균보다는 훨씬 높을 수 있었거든.
5.비현실적이었던 반평균.
나는 시험볼 때마다 항상 시험직전날에만 벼락치기를 했고, 그렇게 공부하면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적당한 수준에서 이해는 되었으나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이해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암기하는 단계와 출제될 문제를 다양하게 대비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대충 80점 정도까지만 성적이 나온다. 나로선 그당시 벼락치기로 투자한 노력대비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고 봐야지. 중학교에서 80점이면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특별히 아주 못한 것도 아닌 점수였다. 다만 서현고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80점이란 점수가 굉장히 특별한 점수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반 전체의 전과목 평균이 95점을 넘겨서.. 사실은 서현고가 비정상적으로 우등생만 모아놔서 그렇지, 어딜 가나 그 정도로 이해하고 시험보는 학생이 많은게 정상이다. 반평균은 어딜가나 70~80점 정도가 적당하지 않나. 하지만 우리 서현고 친구들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한명한명 각각이 다 중학교때까지 반에서 손꼽히는 성적을 자랑하던 친구들이었거든. 선생님들이 변별력 있게 출제하고 싶으면 일개 내신 중간기말고사따위를 경시대회급으로 내야하는데 그건 정말 불필요한 난이도일 뿐이니 그럴 수도 없고.. 어쨌거나 80점이라는 무난한 성적으로 반평균을 어마무시하게 깎아먹은 나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했고, 그러면서도 속상함이라곤 1도 없었다. 이 철부지 막내를 잘하면 서울대 보낼 수도 있겠다는 꿈을 잠시나마 꾸어본 적이 있는 부모님의 속사정이야 어쨌건간에 나는 매우 해맑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6.내신이 뛰어났던 여자반.
특히 여자반(당시엔 학생들이 공부에 집중을 못할까봐 남녀 분반을 하는게 상식적이었다.)에서는 나처럼 이렇게 대놓고 성적으로 경쟁을 포기한 케이스가 거의 없었고. 여자반이 아니라 전교에서 봐도 예체능 특기생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한 두과목은 아예 서현고에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 숫자보다 더 높은 숫자의 등수를 성적표에서 확인한 적도 있을 정도로 반에서 매우 독특한 케이스에 해당했고. 최종 성적표가 나오기 직전 각자 점수를 확인하라고 꼬리표(이런 것도 기억이 나다니 신기하다)를 받으면 옆의 친구들이 속상한 표정으로 자기가 실수를 한 몇 과목들의 점수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 과목에서 아주 고르게 반평균을 깎아먹은 내 꼬리표는 온 교실을 돌아다니며 속상한 친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자그마치 이런 성적을 받은 애도 저렇게 히히낙낙인데 그냥저냥 감사히 자신의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메세지로 읽지 않았을까 싶다. 꼬리표를 돌아다니게 한 장본인은 그런 고차원적인 의도따위 전혀 없이 그저 시시덕거릴 뿐이었지만.
7.경쟁보다 자율성이 돋보였던 학교
서현고에 가면 반에서 너무 심하게 경쟁해서 힘들 것이다라고 지레 짐작해서 충분히 서현고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위권 고등학교로 진학한 케이스들을 몇몇 보았는데, 당시에는 ‘특차’(수능성적만으로 내신없이 대학을 지원하는)전형이 있었기에 그다지 교내에서 친구들을 밟고 올라서려는 심한 경쟁 분위기는 감지하지 못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 - 경쟁을 포기한 꼴찌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만, 정말이지 서현고 생활에서 기억나는 건 성적 경쟁 같은 것이 아니다. 원체 다들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풀어줬던 두발과 복장규제, 야간 자율학습은 강제가 아닌 정말 말그대로 자율이었던 것, 그리고 친구처럼 지내주었던 선생님들이 기억에 남는다.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는게 당연했던 학교.
8.노는것도 잘했던 서현고
그리고 수재들이 공부에만 관심을 가질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다른 부분에서도 꽤나 열심이었던게 기억이 나는데, 아주 활발했던 동아리 활동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분당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 최고였던 축제(축제 문화를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들은 공부에 대한 강박이 있던 수많은 친구들의 가슴을 몰캉몰캉하게 만들 정도로 매우 압도적인 행사였다. 그 디테일은 아무리 써도 부족하니 따로 쓰기로 하고.
9. 서현고 학생들의 관심사
공부잘하는 애들이라고 해서 공부에만 관심 갖는게 아니다. 별의별 사소한 것들에 관심들이 많았는데. 그 소소한 관심사들에 대해서는 사실 끝도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텐데 지금 얼른 생각나는 것만 대충 이러하다.
몇반 누구랑 몇반 누구랑 사귀었는가, 저기 눈에 띄는 누구는 어느 동아리인가, 점심 방송에 좋아하는 친구를 위한 신청곡으로 무엇을 신청할까, 소풍이나 수학여행 그리고 수련회나 축제 등 전적으로 사복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에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입을 것인가, 반 친구들은 어떻게 입고 왔는가, 대표적인 킹카와 대표적인 퀸카들은 어떻게 입고 왔는가, 장기자랑 행사에서 누가 무슨 춤을 추었는가, 맨날 노래하러 나오는 쟤는 왜 맨날 삑사리인가(김준 반성해라), 복귀한다는 서태지 신보앨범은 몇월 몇일에 발매하는가, 라르고(당시 서현역을 휘어잡았던 레코드가게)에 몇시까지 가면 되는가,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뛰어가서 사오면 늦지 않을 수 있는가, 그 당시 핫했던 아이돌 그룹은 우리 반 친구중에 누가 어느 멤버를 좋아하는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타이타닉 영화를 금산시네마에서 보려면 언제 야자를 빼먹어야 하는가, 레오나르도는 왜이리 잘생겼는가(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꽃미모), 저기 저 남자선배는 왜 저렇게 머리를 길러서 머리띠를 하는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불꽃같은 피부를 돋보이게 강조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폴로나 나이키 짭(모조품)을 사려면 이태원에 가는 것이 옳은가, 곱슬머리들에게 혁명적인 기술이었던 매직스트레이트라는 것이 처음 등장했는데 분당 미용실에선 30만원 이대앞 꽃샘미용실에선 3만원에 할 수 있는게 실화인가, 종아리의 알통을 감추고 다리가 예쁘게 보이게 하는 적정한 발토시 높이는 어느 선인가, 그 당시 유행했던 더듬이 머리 - 머리가 작아보이기 위해서 옆머리를 내고 얼굴에 딱 붙이는 - 그 더듬이머리에는 어느 정도의 숱과 길이가 적당한가, 고등학생 여드름 터지는 피부에는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억양주의) 클린앤클리어 로션과 포밍클렌저는 왜 그리 좋아보이는데 얼굴이 땡기는가, 서현역에 어느 떡볶이집이 맛있는가, 학교앞 편의점 건물 안쪽에 새로 생긴 모여라분식집은 핫도그를 매 쉬는 시간마다 먹어도 건강에 문제가 안생길까, 베지밀은 에이가 낫냐 비가 낫냐, 학교 앞 편의점(1층건물인데다가 주변 환경이 조용해서 각종 광고나 영화, 드라마 촬영장소로 자주 쓰였다)에 드라마 촬영시 인기 배우들이 언제 도착하는가, 변비가 있는 친구들이 왜 멀쩡한 학교 화장실을 두고 삼성프라자까지 가서 해결하고 오는가 등등등에 대해서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들을 했더랬다.. 사실 쓰려고 마음먹으면 끝도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 지금 와서는 디테일이 잘 기억도 안나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나 중요했던 문제들이었다.
10.대단히 비현실적이었던 고등학교.
우리나라만큼 대학입시서열이 중요한 나라에서 고등학교 3년간을 그 어떤 자율성도 빼앗긴 채로 암흑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양하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지만 그 당시엔 수능과 내신 밖에 없던 시절. 그 당시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오죽했으면 여고괴담(1998 개봉) 같은 영화가 6편까지 나오도록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까. 그만큼 힘들 수 밖에 없는 3년의 고등학교 시절..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도 흥분하기 바빴던 열뜬 시기를 공부로 억누르고 살면서 우리들 각자에게 당연한 스트레스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를 포함한 학생들 각자가 ‘서현고 학생이어서’ 비교적 행복하게 보냈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일단 서현고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3년 내내 함께 했고,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학교 분위기, 놀 땐 미친듯이 놀더라도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놀라운 학습환경 등이 있었기에, 학업성취도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나같은 철부지도 그나마 크게 뒤쳐지지 않고도 행복하게 보낼수 있었다.
서현고의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는 분당이라는 새로 탄생한 신도시에서 갑작스레 전국적인 절대강자로 떠오른 명문학교, 그중에서도 사립이 아닌 공립학교, 특목고가 아닌 일반고여서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비록 건물 상태는 분당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시설로 매우 후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성적수준은 전국적인 명성을 날릴 정도로 매우 뛰어났었고, 그 때문에 전국에서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는 내노라 하는 교장, 교감, 선생님들이 오고싶어 했던 학교였었다.
실제로 도단위 교육장 승진을 앞둔 분이 서현고 교장으로 부임해 오셨었고 그 분과 또 한분의 유능한 교감 선생님 때문에 무슨 임용고시 수석하셨거나 잘 가르치기로 유명하시다는 분들이 여럿 오셨다고 들었다. 그 교장 선생님은 축제때마다 수십개의 동아리들에 아무리 못해도 40만원 이상 지원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게 공립에서 누군가 공금을 도둑질하지만 않는다면 리더가 깨끗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는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 우리가 고3이었을 때 은퇴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은퇴하실 당시 우리들 졸업식에서 축사를 마치자 강당에 있던 학생들 대부분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던 기억이 난다. 진심으로 존경했었다. 그 교장 선생님을.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감동시켜던 일화는 정말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선생들마저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3들 중에 야간자율학습을 11시까지 연장했으면 하는 미친 놈들이 서현고에 꽤 많았었는데, 교무실에서 회의때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돌아가면서 11시까지 하자는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선생님들 대다수가 반대를 하셨다고 한다. 가정이 있는데 어떻게 11시까지 하느냐고 쉬고 싶다고. 한시간 더 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11시는 너무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던 선생님들의 의견을 묵묵히 다 들으신 후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그럼, 선생님들 다 가시죠. 제가 남겠습니다.” …그 이후, 선생님들은 아무말 없이 11시까지 남았다고 전해진다..
그 시절 그렇게 좋은 학교였는지도 모르고 여느 고등학생처럼 담임욕하고 함께 놀던 유치하고 어설펐던 친구들은 이젠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당시 분당의 중심지였던 서현역 로데오거리, 오픈한지 얼마 안되어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삼성프라자에 도보로 5분안에 당도할 수 있었던 학교, 그렇기에 도시적인 혜택까지 더욱 많이 받은 학교. 개교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신도시의 학교여서, 전례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다른 명문고들과는 달리 그 어떤 규칙도 절대적인 것이 없었던 학교. 그래서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던 - 우리나라처럼 억압된 입시환경에서는 다소 비현실적인 문화까지 가능했던 학교였다. 그 문화가 교장이 바뀐 이후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소식에 다소 슬펐다만, 아무튼 내가 다니던 시절 서현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시는 있을 수 없는 판타지 속의 학교였다.
11. 마치며.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오른 것들 중에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음이 놀라운 것들이 꽤나 있었고.
그렇게 19년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시간이 새삼 행복했다.
한번에 다 말하면 재미없지 하면서 줄인 것이 여기까지 길어져버렸지만
쓰면 쓸 수록 마치 내 멋대로 ‘응답하라서현고'를 구상해본 것 마냥 즐거웠고,
떠올릴 수록 다채롭게 펼쳐지는 기억 속에 허우적대다가 더 쓰고 싶은 것을 참으며 겨우 빠져나온다.
그런 판타지스쿨의 학생이었던 것.
이 사실이 나는 아직까지도 자랑스럽다.
끝.